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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이연(敢而然)/김영민,"동무와 연인", 배경 지식

말에 지배당한 정신: 슈레버 판사의 망상과 그것을 바라본 세 개의 시선

by To Be or... Whatever 2025. 7. 2.

😎 먼저, 이 글은 김영민,『동무와 연인 』을 읽는 도중에 만난 한 문장에 대한 궁금증으로부터 시작한다. 이 문장 속에 등장하는 사건들을 추적하고, 개인적인 감상을 정리한다. 그러니, 결론부의 감상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임을 미리 밝혀두며, 이 글의 시작이 되었던 문장을 인용한다. 

 

문제는, 당신보다 예쁘고 명석할 뿐 아니라 말까지 빠른 여자를 애인으로 두는 일에 관한 것이다.
슈레버 판사의 유명한 증례를 통해 프로이트나 카네티(E. Canetti)가 적절하게 밝혔듯이, 말로써 세상을 지배하려는 편집증적 남성 권위주의자들(=지식인들)에게 이것은 영원한 숙제가 아닐 수 없다. 그들에게 편리한 대상은 예쁘고 말이 빠르지만 멍청하다든지, 명석하고 말이 빠르지만 예쁘지 않든지, 명석하고 예쁘더라도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말은 영원한 능동성의 징표인 것! 그러므로,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항의조차, 그 본질에서 곧 '말'에 다름 아니다. 천하의 볼테르도 샤틀레 부인을 일러 '고담준론을 일삼는 폭군'이라고 비꼬았으니 그 역시 명석하고 말이 빠른 애인을 둔 탓에 제 나름의 비용을 치른 모양이다.

-김영민,『동무와 연인 』, 100쪽, 한겨레출판(주),2008

 

1부: 슈레버 판사, 언어에 침식된 정신

아버지의 그림자와 권위의 역설

다니엘 파울 슈레버(Daniel Paul Schreber, 1842–1911)를 이해하려면 먼저 그의 아버지를 알아야 한다. 다니엘 고트로프 모리츠 슈레버(Daniel Gottlob Moritz Schreber)는 19세기 독일에서 저명한 정형외과 의사이자 교육학자였다. 그는 아동의 몸과 정신을 "올바르게" 형성하기 위한 극도로 체계적인 방법론을 개발했다. 아이들의 자세를 강제로 교정하는 기계적 장치들까지 발명했을 정도로, 그의 교육철학은 한마디로 완벽한 통제였다.

 

이런 아버지 밑에서 자란 아들이 법관이 되어 이성과 규범의 최고 권위자가 된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그의 정신은 예상치 못한 균열을 드러냈다. 1884년 첫 발병 이후 세 차례의 재발을 겪은 슈레버에게, 특히 작센 고등법원장으로 승진한 직후인 1893년부터 1902년까지의 9년간은 깊은 고통의 시간이었다.

흥미롭게도 그의 발병은 항상 승진과 함께 찾아왔다. 권위의 자리에 오를수록 그는 역설적으로 그 권위에 압도당했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완벽한 통제에 대한 강박이, 이제 그 자신을 통제 불가능한 상태로 몰아넣었던 것이다.

 

여성으로 변해가는 몸: 권력과 정체성의 전복

슈레버가 겪은 가장 중심적인 망상은 자신의 신체가 여성으로 변하고 있다는 확신이었다. 이는 단순한 성별 정체성의 혼란이 아니라, 존재론적 차원의 근본적 변화였다. 처음에는 극도의 공포와 저항으로 받아들여졌던 이 변화는 점차 신의 의지로 해석되었다. 결국 "나는 여성이 되어야만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는 메시아적 사명으로 승화되었다.

당시 가부장적 권력 구조의 정점에 있던 남성이 스스로를 여성으로 인식하게 되는 이 전복적 변화는 단순한 증상을 넘어선다. 그것은 권력, 젠더, 그리고 개인의 내적 불안이 복합적으로 작동한 결과였다. 동시에 기존 질서에 대한 무의식적 저항이기도 했다.

 

신의 언어: 파편화된 소통의 공포

슈레버의 『한 신경병자의 회고록』에서 가장 독특하면서도 중요한 부분은 '신경 언어(Nervensprache)'에 대한 서술이다. 그는 하늘에서 뻗어 내리는 '신경'이 전선처럼 자신의 정신에 직접 연결되어 있다고 믿었다. 이 신경을 통해 전달되는 '신의 말'은 끊임없이 그의 귀에 들려왔지만, 그 언어는 완전하지 않았다.

슈레버가 기록한 신의 언어는 문법적으로 불완전하고 파편적이었다. 문장은 중간에 끊어지고, 단어들은 의미 없이 반복되었으며, 때로는 완전히 새로운 조어들이 등장했다. 이는 단순한 환청이 아니라, 언어 자체가 해체되고 재구성되는 과정이었다. 그에게 언어는 더 이상 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정신을 지배하고 재편하는 외부의 힘이 되어버렸다.

 

메시아의 짐: 세상을 구원해야 하는 유일한 존재

슈레버는 자신이 세계를 파괴하려는 악한 세력들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고 확신했다. 이는 단순한 과대망상이 아니라, 극도의 책임감과 고립감이 결합된 복합적 구조였다. 병적 상태 속에서도 그는 세계에 대한 의무를 포기하지 않았다. 이것이 오히려 그의 고통을 가중시켰다.

 

❕  1부 소결

슈레버의 경험은 개인적 차원을 넘어선다. 그의 망상 속에는 권위와 통제, 언어와 권력, 개인과 사회의 복잡한 관계가 얽혀 있다. 바로 이 복잡성 때문에 그의 기록은 20세기 지성사에서 서로 다른 관점의 깊은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2부: 슈레버를 바라본 세 개의 시선

슈레버의 회상록이 단순한 정신질환 기록을 넘어 중요한 텍스트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이 기록이 언어와 권력, 주체성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20세기의 서로 다른 세 사상가가 슈레버에게서 발견한 것은 각각 달랐지만, 모두 현대 문명의 핵심적 문제를 다루고 있었다.

 

프로이트의 개인적 해석: 억압된 욕망의 투사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슈레버를 직접 만난 적이 없었다. 오직 회상록만을 토대로 1911년 발표한 「편집증의 정신분석학적 고찰에 관한 어떤 자서전적 기록에 대한 주석」는 정신분석학사의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프로이트는 슈레버의 증상을 이렇게 해석했다.

무의식 속 동성애적 욕동의 억압과 그 결과로 생긴 투사 메커니즘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프로이트는 슈레버가 플렉시히 박사와 포슈만 박사—그를 치료했던 의사들—에게 박해당한다고 믿는 것을 주목했다. 프로이트의 분석에 따르면, 이는 실제로는 이들에 대한 억압된 사랑이나 의존 욕구가 외부로 투사된 결과였다. "나는 그를 사랑한다"는 받아들일 수 없는 감정이 "그가 나를 박해한다"로 전환된 것이다.

 

특히 '여성화' 망상에 대한 프로이트의 해석은 정교했다. 슈레버가 "내가 남성에게 욕망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여성으로 변했기 때문에 남성에게 끌리는 것이다"라는 심리적 방어기제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사회에서 용납될 수 없었던 동성애적 욕망을 정당화하는 무의식적 전략이었다.

프로이트는 또한 슈레버의 언어 경험을 흥미롭게 해석했다. 외부 언어가 자신의 사고를 조종한다는 슈레버의 믿음을, '언어를 통해 세계를 완벽하게 통제하려 했던' 이성 중심적 욕망이 붕괴되는 과정으로 본 것이다.

 

카네티의 사회적 분석: 언어권력의 메커니즘

노벨문학상 수상자 엘리아스 카네티는 슈레버의 회상록에서 전혀 다른 의미를 포착했다. 그는 개인의 정신 내부보다는 권력과 언어의 사회적 관계에 주목했다. 주저 『군중과 권력』에서 슈레버는 '말이 폭력이 될 수 있다'는 명제를 구현하는 상징적 인물로 등장한다.

카네티의 핵심 통찰은 이것이었다:

권력은 물리적 강제력보다 언어적 반복을 통해 더 효과적으로 작동한다.

 

슈레버가 경험한 '신경 언어'—끊임없이 반복되는, 의미가 해체된 명령들—는 권력이 언어를 통해 개인의 정신을 식민지화하는 과정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카네티는 구체적인 예를 제시했다. 히틀러의 연설을 생각해보라. 같은 슬로건의 무한 반복, 논리적 설득보다는 감정적 충격에 의존하는 수사법, 개인의 비판적 사고를 마비시키는 집단적 환호. 이는 슈레버가 들었던 신의 음성—불완전하고 반복적이며 강박적인 언어—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현대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광고는 같은 메시지를 끊임없이 반복하여 무의식에 침투한다. 정치적 구호는 복잡한 현실을 단순한 이분법으로 환원시킨다. 소셜미디어는 확증편향을 강화하는 정보만을 선별적으로 제공한다. 카네티에게 슈레버는 언어권력에 의해 존재 자체를 재구성당한 현대인의 원형이었다.

 

 

라캉의 구조적 접근: 언어와 주체의 관계

자크 라캉은 슈레버를 정신분석학의 구조주의적 전환에서 중요한 사례로 다뤘다. 라캉에게 슈레버의 경험은

'아버지의 이름(Nom-du-Père)'이 배제(forclusion)될 때 주체가 어떻게 해체되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이었다.

 

'아버지의 이름'이란 라캉의 핵심 개념 중 하나로, 상징적 질서—법, 언어, 사회적 규범—를 가능하게 하는 구조적 기능을 뜻한다. 이는 실제 아버지가 아니라, 개인이 사회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고 타자와 관계를 맺을 수 있게 해주는 원리다. 쉽게 말해, "이것은 허용되고 저것은 금지된다"는 기본적 질서 감각이다.

 

라캉의 관점에서 슈레버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는 아버지(법관)의 위치에 있으면서 동시에 그 위치를 떠받치는 상징적 기반을 내재화하지 못했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은 통제의 기법이지, 질서에 대한 근본적 신뢰가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권위의 자리에 올랐을 때, 그는 자신이 무엇을 근거로 판단해야 하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이때 나타나는 것이 언어의 파편화다. 라캉에 따르면, 상징적 질서가 붕괴할 때 언어는 의미 작용을 멈추고 순수한 기표(소리나 문자 자체)의 연쇄로 전락한다. 슈레버가 들었던 불완전한 신의 언어들—끊어진 문장, 의미 없는 반복, 새로운 조어들—은 모두 이런 구조적 해체의 증상이었다.

슈레버의 '여성화' 망상 역시 이 맥락에서 이해된다. 그것은 젠더 정체성의 문제가 아니라, 주체가 언어 질서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지 못할 때 나타나는 '존재론적 불안'이었다. 남성도 여성도 아닌, 언어가 부여하는 어떤 정체성도 안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 말이다.

 

 

❕  2부 소결


세 사상가의 관점은 서로 다르지만 상호 보완적이다. 프로이트는 개인적 무의식의 역동을, 카네티는 사회적 권력의 메커니즘을, 라캉은 언어 구조 자체의 작동을 조명했다. 이 모든 차원이 동시에 작동하는 곳이 바로 현대 사회다.

 

 


3부: 이 만드는 세계, 이 부수는 세계

세 사상가가 슈레버의 이야기에서 발견한 것은 각기 달랐지만, 모두 '말'이라는 공통분모로 수렴된다. 이는 우연이 아니다. 인간은 언어적 존재이고, 언어는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고 자아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도구이기 때문이다. 슈레버의 경험은 이 언어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극한 상황을 보여준다.

 

말의 이중성: 창조와 파괴

언어는 본질적으로 이중적이다.

그것은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다리인 동시에, 오해와 갈등을 낳는 근원이기도 하다.
현실을 명확하게 지시하는 도구인 동시에, 현실을 왜곡하고 조작할 수 있는 무기이기도 하다.

 

슈레버의 경험은 이런 언어의 이중성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그에게 언어는 더 이상 의사소통의 매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를 외부 세계로부터 격리시키고, 고유한 현실 속에 가두는 감옥이 되었다. 동시에 그런 언어를 통해 그는 자신만의 의미 체계를 구축하고, 견딜 수 없는 현실에 나름의 질서를 부여할 수 있었다.

 

프로이트가 주목한 '억압된 욕망의 언어', 카네티가 분석한 '권력의 언어', 라캉이 탐구한 '해체되는 언어'는 모두 이런 언어의 이중성을 서로 다른 각도에서 조명한 것이다. 세 사상가 모두 언어가 단순한 도구 이상이라는 것을, 그것이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차원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슈레버를 통해 확인했다.

 

남성 권위의 언어와 배제된 목소리들

슈레버의 이야기에서 특히 주목할 부분은 그의 '여성화' 망상이다. 법관이라는 남성 권위의 정점에 서 있던 그가 여성으로 변해가고 있다고 느꼈다는 것은 단순한 성 정체성의 혼란을 넘어선다.

 

19세기 말 독일 사회에서 남성의 언어는 법, 질서, 권위를 대표했다. 그것은 명확하고, 논리적이며, 통제 가능한 언어였다. 반면 여성은 이런 공적 언어 영역에서 배제되어 있었다. 여성의 경험과 감정, 직관은 '말할 수 없는 것', '비이성적인 것'으로 치부되었다.

슈레버가 여성으로의 변화를 처음엔 극도의 공포로 받아들였다가 나중에는 신성한 사명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과정은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남성 중심적 언어 질서가 포괄하지 못하는 다른 차원의 경험에 대한 무의식적 갈망일 수 있다.

 

완벽한 통제와 논리로 구성된 아버지의 언어 세계에서 살아온 그가, 그 언어로는 담을 수 없는 무언가를 여성성을 통해 표현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침묵하는 목소리들

슈레버의 회상록을 읽으면서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것이 있다. 그것은 그의 목소리 뒤에 숨어 있는 수많은 침묵하는 목소리들이다. 그의 어머니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그의 아내 또한 그저 '헌신적인 배우자'로만 그려진다. 그의 가족들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다뤄진다.

이런 침묵은 우연이 아니다. 슈레버가 속했던 세계는 남성의 목소리만이 '말할 가치가 있는' 세계였다. 여성들의 경험, 감정, 관점은 공적 담론에서 체계적으로 배제되었다. 슈레버의 망상 속에서 자신이 여성이 되어야만 세계를 구원할 수 있다는 믿음은, 역설적으로 이런 배제된 목소리들의 필요성을 드러내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현대적 함의: 디지털 시대의 슈레버들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슈레버의 이야기는 어떤 의미일까? 카네티가 예견했듯이, 언어권력의 메커니즘은 더욱 정교해졌다. 알고리즘은 우리가 접하는 정보를 선별하고, 개인화된 광고는 우리의 욕망을 조작한다. 소셜미디어는 확증편향을 강화하여 각자를 고립된 정보의 감옥에 가둔다.

 

슈레버가 들었던 '불완전한 신의 언어'는 이제 끝없는 알림, 단편적인 뉴스, 자극적인 헤드라인의 형태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 '디지털 시대의 슈레버'가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슈레버의 이야기가 단순한 경고에 그치지 않는 이유는, 그가 언어의 파괴적 힘과 동시에 재구성의 가능성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만의 언어 체계를 만들어냄으로써, 비록 고통스럽지만 나름의 의미 있는 세계를 구축했다. 이는 우리에게도 희망을 준다. 언어에 의해 지배당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통해 새로운 의미를 창조할 가능성 말이다.

 

 


결론: 말의 힘과 인간의 존재

슈레버 판사의 이야기는 한 개인의 비극을 넘어, 언어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직면하는 근본적 딜레마를 보여준다. 프로이트, 카네티, 라캉이 각기 다른 관점에서 조명한 이 사례는, 언어가 단순한 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층위와 연결되어 있음을 증명한다.

 

언어는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동시에, 우리를 가장 깊은 고통으로 빠뜨릴 수 있다. 그것은 세계를 이해하게 해주는 동시에, 세계로부터 우리를 소외시킬 수 있다. 슈레버의 경험은 이런 언어의 양면성을 극한까지 밀고 나간 사례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이야기는 희망도 담고 있다. 언어가 해체되는 극한 상황에서도 인간은 새로운 의미를 창조해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창조 과정 자체가 치유의 가능성을 열어준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 각자가 언어와 맺는 관계를 성찰해보라. 그래야만 우리는 언어에 지배당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통해 진정한 자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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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ritten by To Be or... Whate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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