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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이연(敢而然)/김영민,"동무와 연인", 배경 지식

'조르주 바타이유'의 '성': 문명이 억눌러온 원시적 힘에 대하여

by To Be or... Whatever 2025. 6. 6.

조르주 바타이유(Georges Bataille, 1897-1962)는 20세기 프랑스의 이단적 사상가였다. 철학자도, 문학가도, 인류학자도 아니면서 동시에 모든 것이었던 그는 인간 존재의 가장 어두운 부분들—성, 죽음, 광기, 폭력—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특히 그에게 '성'은 단순한 생물학적 행위가 아니라, 문명이 가장 강력히 억압해온 근본적 힘이었다.

바타이유의 사상은 난해하기로 유명하지만, 그 핵심을 차근차근 따라가보면 놀라울 정도로 일관된 논리를 발견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바타이유가 성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그리고 왜 그것이 현대 문명에 대한 가장 강력한 도전이 될 수 있는지를 살펴보겠다.

성은 쾌락 이상의 것이다: 에로티시즘의 진정한 의미

우리는 보통 성을 두 가지 방식으로 이해한다.

하나는 종족 번식을 위한 생물학적 기능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나누는 친밀한 쾌락이다. 바타이유는 이 두 관점 모두 성의 본질을 놓치고 있다고 본다.

그의 대표작 『에로티시즘』(1957)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에로티시즘은 삶의 연속성에 대한 침입이며, 죽음과의 조우이다."

 

여기서 '삶의 연속성'이란 우리가 매일 반복하는 일상적 삶을 뜻한다.

아침에 일어나 직장에 가고, 사람들과 대화하고, 식사하고, 잠자리에 드는 규칙적이고 예측 가능한 리듬 말이다. 이런 일상은 우리 자아의 경계를 명확하게 유지시켜준다. 나는 나이고, 타인은 타인이며, 각자의 역할과 정체성이 분명하다.

 

그런데 성적 경험은 이 안정된 질서를 흔든다.

강렬한 흥분 상태에서 우리는 평소의 이성적 통제력을 잃는다. 자아의 경계가 흐릿해지고, 때로는 완전히 사라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바타이유는 바로 이 지점에 주목한다.

"성적 결합에서 우리는 일상의 논리와 규칙이 지배하지 않는 원초적 세계를 엿본다."

 

이는 성이 단순한 즐거움이 아니라, 문명이 억눌러온 다른 차원의 현실—감정의 폭풍, 이성의 붕괴, 통제 불가능한 충동들이 밀려드는 세계—로 향하는 문이라는 의미다.

 

금기와 그 파열: 문명의 경계선에서 벌어지는 싸움

바타이유에 따르면, 모든 문명은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금기'를 설정한다. 금기는 단순한 금지령이 아니다. 그것은 '이것은 안 된다'고 선을 그음으로써 문명의 영역과 그 바깥을 구분짓는 경계표지다.

흥미롭게도 바타이유는 금기가 단순한 억압 장치가 아니라고 본다. 그는 『금기와 초월성』에서 이렇게 쓴다:

"성스러운 것은 금기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파괴되기 위해 존재한다."

 

즉, 무엇인가를 '건드려서는 안 되는 것'으로 만드는 순간,

역설적으로 그것을 건드리고 싶은 욕망도 함께 생겨난다는 것이다.

성은 바로 이런 금기의 대표적 사례다.

 

왜 성이 금기가 되었을까?

성에는 육체적 쾌락뿐만 아니라 폭력성, 무질서, 감정의 격류, 때로는 고통과 출혈까지 뒤엉켜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요소들은 문명이 추구하는 질서와 합리성에 위협이 된다.

 

현대 사회는 성을 공적 영역에서는 철저히 통제하면서, 사적 영역에서는 '사랑'이라는 감정적 틀 안에 가둬두려 한다.

하지만 바타이유는 성이 결코 그렇게 길들여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그것은 언제나 기존 질서를 뒤흔들 수 있는 '금기의 파열점'이다.

"인간은 금기를 넘음으로써 비로소 인간이 된다."

 

성은 이 금기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행위이며, 그 과정에서 개인의 자아와 사회의 질서 모두 위협받는다.

바타이유에게 이는 공포스러운 일이면서 동시에 인간이 진정으로 '살아있음'을 느끼는 순간이기도 하다.

노동 중심 사회와의 충돌: 왜 성은 억압당하는가?

바타이유는 현대 문명이 철저히 '유용성'의 논리로 돌아간다고 진단한다. 그의 저작 『저주의 몫』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현대 문명은 오직 유용한 것만을 가치 있다고 본다. 유용하지 않은 것은 제거되거나 금기시된다."

 

노동이 바로 이런 유용성의 상징이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 가서, 정해진 목표를 달성하고, 정해진 보상을 받는 시스템. 이 시스템은 우리의 충동과 감정을 통제 가능한 범위 내로 억제하도록 요구한다.

 

성은 이런 체계와 정면충돌한다.

성적 쾌락은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으며, 감정의 폭발은 조직의 질서를 해친다. 성적 흥분 상태의 인간은 업무 효율성이나 생산성과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성은 사회적으로 특정 시간과 공간으로 제한된다. 하지만 바타이유는 여기서 중요한 통찰을 제시한다:

"금기는 단순한 억압이 아니라, 파열을 전제로 한다. 인간은 금기를 넘음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

 

즉, 금기는 그것을 넘고 싶어하는 욕망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우리가 성을 금기시하는 이유는 그것이 위험하기 때문이지만, 동시에 그 위험함 때문에 우리는 그것에 끌린다. 이것이 인간 존재의 근본적 모순이다.

 

잉여와 낭비: 문명이 외면한 진실

바타이유의 가장 독창적인 아이디어 중 하나는 '잉여(surplus)'에 대한 사유다.

그는 인간 사회가 항상 필요 이상의 에너지, 자원, 감정을 만들어낸다고 본다.

문제는 이 잉여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이다.

"경제의 본질은 축적이 아니라 낭비다. 삶의 진실은 생산이 아니라 소진에 있다."

 

현대 사회는 이 잉여를 억제하거나 다시 생산 시스템으로 재투입하려 한다.

여가시간마저 '자기계발'이나 '재충전'의 명목으로 생산성 향상의 도구로 만들어버린다. 하지만 바타이유는 이 잉여야말로 인간 문명의 본질이라고 주장한다.

 

축제, 전쟁, 종교적 제의, 예술 창작, 그리고 성—이 모든 것들은 잉여 에너지가 분출되는 방식들이다.

이들은 효율적이지도, 실용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철저히 낭비적이다.

하지만 바로 그 낭비를 통해 인간은 단순한 생존 이상의 의미를 만들어낸다.

 

성은 이런 잉여가 가장 격렬하게 표현되는 영역이다.

성행위는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 대신 에너지를 순수하게 소모한다.

그 과정에서 개인의 자아는 해체되고, 사회의 질서는 일시적으로 중단된다.

바타이유는 바로 이것이 인간적 자유의 본질이라고 본다.

 

에로스와 죽음: 왜 성과 죽음을 함께 말하는가?

바타이유의 사상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 중 하나는 성과 죽음의 연결이다. 그는 『에로티시즘』에서 이렇게 쓴다:

"우리는 성을 통해 자아를 무너뜨리는 쾌락과 만난다. 그 순간 우리는 더 이상 '나'가 아니라, 어떤 더 큰 흐름 속으로 사라진다."

 

'더 큰 흐름'이 바로 죽음과 닮아 있다는 것이 그의 핵심 아이디어다.

죽음은 개별적 자아의 완전한 소멸이고, 성적 절정의 순간은 자아 경계의 일시적 해체다.

둘 다 '나'라는 개념이 흔들리거나 사라지는 경험이다.

 

하지만 바타이유는 성과 죽음을 동일시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죽음을 진정으로 사유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성을 통해서다."

 

우리는 평상시에 죽음에 대해 추상적으로만 생각한다. 하지만 성적 고조의 순간에는 자아의 경계가 실제로 흔들리는 경험을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죽음이라는 궁극적 경험이 어떤 것일지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타이유가 던지는 질문들

바타이유의 사상은 편안하지 않다. 그는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많은 것들에 의문을 던진다.

생산성이 정말 삶의 목적인가? 질서와 안정이 항상 좋은 것인가? 합리성이 인간 존재의 유일한 기준인가?

 

그의 관점에서 보면, 현대인들은 너무 많은 것을 억압하며 살고 있다.

우리는 효율성을 추구하느라 비효율적인 것들—축제, 놀이, 낭비, 무의미한 즐거움—을 포기했다.

우리는 안전을 추구하느라 위험하지만 생생한 경험들을 회피한다.

바타이유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넘치도록 살아야 한다. 넘침 없이는 진정한 삶이 있을 수 없다."

 

이는 무분별한 방종을 부추기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삶의 완전성을 추구하는 말이다.

빛과 어둠, 질서와 무질서, 이성과 광기, 삶과 죽음—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삶 말이다.

 

오늘날 바타이유를 읽는 의미

바타이유를 읽는다는 것은 우리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외면해온 삶의 측면들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일이다.

그것은 때로 불편하고 혼란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 그리고 자신이라는 존재에 대해 더 깊이 질문하게 된다.

 

현대 사회가 점점 더 효율성과 생산성을 강조하는 지금, 바타이유의 목소리는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에게는 때로 '쓸모없는' 경험들이 필요하다.

통제를 벗어나는 순간들, 예측 불가능한 감정들, 비합리적인 충동들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바로 그런 것들을 통해 우리는 단순한 기능적 존재를 넘어서는 무언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바타이유의 성 철학은 결국 인간다움에 대한 근본적 성찰이다.

 

그는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정말로 살고 있는가, 아니면 단지 기능하고 있을 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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