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은 흔적을 남긴다. 그리고 그 흔적은 몸이 아니라, 말과 시선 속에 있다.”
‘악(惡)’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그것은 단순한 행위일까, 아니면 더 근원적인 구조일까?
프랑스 철학자 **폴 리퀘르(Paul Ricœur)**는 이 질문에 대하여 탁월한 철학적 도전을 시도한다.
그는 『악의 상징(Le Symbolisme du mal, 1960)』에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악’이 단순한 죄나 잘못이 아니라,
인간의 상상력과 말, 그리고 타자의 시선에 의해 구성된다고 말한다.

🧼 ‘때’는 묻지만, ‘흠’은 새겨진다
리퀘르는 먼저 **‘때(tache)’와 ‘흠(faute)’**이라는 두 상징을 구분한다.
이 구분은 단어의 차원이 아니라, 철학적 인식론의 층위 차이이다.
- 때: 피부에 묻는 더러움, 물리적 오염.
- 흠: 말해지는 잘못, 낙인, 윤리적 결함.
‘때’는 씻으면 사라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흠’은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다.
왜냐하면 흠은 누군가가 그것을 말했기 때문이며,
누군가의 시선 속에서 그것이 ‘의미’가 되었기 때문이다.
🗣️ 말이 개입될 때, 악은 ‘이야기’가 된다
리퀘르는 ‘악’을 이야기적 구조 속에서 사유한다.
즉, 악은 단지 행위가 아니라, 이야기되고 해석되며 기억되는 행위다.
이때 말은 단지 중계하는 도구가 아니다.
말은 어떤 사건에 의미와 윤리적 구조를 부여한다.
그리고 그 말은 언제나 **타자(他者)**의 시선 속에서 작동한다.
흠은 그렇게 생긴다.
누군가에게 잘못을 저질렀다는 사실보다,
그 잘못이 말해지고 기억되고 해석될 때,
그제야 우리는 스스로를 ‘흠 있는 존재’로 인식하게 된다.
👁️ 타자의 시선: 악의 발생 조건
리퀘르는 타자의 시선이 없이는 ‘흠’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본다.
이는 현상학의 논리이자, 윤리학의 핵심이기도 하다.
자기 안에만 갇힌 실수는 단지 오류일 뿐이다.
그러나 그것이 타인의 윤리적 세계에 접속될 때,
그것은 더 이상 단순한 ‘때’가 아닌,
**공동체 속에 남는 ‘흠’**이 된다.
이 흠은 말로 형성되고, 기억으로 유지되며,
시선의 반복을 통해 강화된다.
🧭 정리하며: ‘흠’이라는 상징의 철학
리퀘르가 구분한 ‘때’와 ‘흠’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정리할 수 있다:
- 차원: 때는 물리적 오염이지만, 흠은 윤리적이고 언어적인 차원을 가진다.
- 성격: 때는 씻으면 제거 가능하지만, 흠은 흔적으로 남아 반복적으로 호출된다.
- 관계: 때는 나 자신의 감각에서 끝나지만, 흠은 타자와 공동체의 시선 속에서 형성된다.
- 구성 방식: 때는 감각적으로 인식되지만, 흠은 말과 해석, 시선의 구조 속에서 구성된다.
이처럼 ‘흠’은 단순히 더러운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며, 말과 타자의 윤리적 질서 안에서 지속적으로 의미를 발생시키는 상징이다.
결국 리퀘르에게 있어서 악은,
개인의 잘못을 넘어 타자의 세계에서 생겨나는 상징적 흔적이다.
‘흠’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만,
동시에 타자의 응답을 기다리는 윤리적 요청의 자국이기도 하다.
📚 더 살펴볼 자료들
- Paul Ricœur, Le Symbolisme du mal, Paris: Aubier, 1960.
- Paul Ricœur, The Symbolism of Evil, Beacon Press, 1967 (영어 번역본).
- 박정자, 『폴 리쾨르의 해석학적 현상학』, 문예출판사, 2005.
-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 Paul Ricœ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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