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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이연(敢而然)/"동무와 연인", 배경 지식

진리와 침묵 사이 — 하이데거, 야스퍼스, 그리고 아렌트

by To Be or... Whatever 2025. 4. 9.

 

철학자의 우정은 시대를 견딜 수 있는가


사진: Unsplash 의 Jonny Gios


진리를 탐구하는 두 사람이,

서로의 생각에 감탄하고 논쟁하면서,

인간적인 신뢰를 쌓아갈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우정은, 한 시대의 비극적 선택 앞에서 끝까지 버텨낼 수 있을까.

 

하이데거와 야스퍼스는 그렇게 만났다.
그리고 한나 아렌트는,

그 두 사람 사이에서 스승과 연인의 얼굴을 동시에 기억한 사람이다.

 

이 글은 그 셋의 이야기, 철학보다 더 어려운 우정의 이야기다.
1920년대 독일, 철학이 아직 ‘세계를 구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간직하던 시절에 시작된 이 인연은,

나치의 등장과 침묵의 시대를 거쳐, 결국 각자의 침묵 혹은 고백으로 귀결된다.

이야기는 화려하지 않지만, 인간적이다.
그리고 철학을 공부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 무게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지를 조용히 되묻는다.


 

1920년대 마르부르크 — 우정의 시작

 

하이데거와 야스퍼스, 두 사람은 처음부터 철학적 운명을 공유한 동료는 아니었다.
야스퍼스는 본래 정신의학을 전공한 의사였고,

《일반병리학》과 《정신병리학 총론》으로 이미 독일 지성계에서 인정받은 존재였다.

반면 하이데거는 에드문트 후설의 조수로, 아직 학문적 무게감을 갖기 전의 젊은 강사에 불과했다.

 

그러나 1920년대 초, 두 사람은

마르부르크와 하이델베르크를 오가며 서신을 주고받았고, 곧바로 강렬한 철학적 공감대를 발견한다.

야스퍼스는 하이데거의 글에서 철학이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하는 가능성을 보았고,

하이데거는 야스퍼스의 존재론적 사유와 ‘경계상황’ 개념에 깊이 매료됐다.

둘의 편지에는 서로를 ‘나의 친구’, ‘사랑하는 동료’라 부르며,

철학이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삶을 건 대화임을 공유하던 열기가 가득하다.

“당신의 사유는 나를 다시 철학하게 만듭니다.
나는 이제 겨우 철학이 무엇인지, 질문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하이데거, 야스퍼스에게 보낸 편지 중 (1921)

 

야스퍼스는 하이데거의 잠재력을 ‘하나의 시대가 낳은 목소리’로 보았고,

하이데거는 야스퍼스를 ‘실존 철학의 진정한 주춧돌’로 여겼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를 끌어올리며, 20세기 독일 철학의 흐름을 형성하는 쌍두마차로 나아간다.

 

하지만 이 뜨거운 우정에는 결정적인 균열이 다가오고 있었다.
철학은 서로를 이해하게 만들지만, 시대는 종종 서로를 갈라놓는다.


 

나치의 그림자 — 갈림길 앞의 철학자들

 

1933년, 히틀러가 독일의 총리로 임명되고, 나치 정권이 본격적으로 권력을 장악해가기 시작한다.

이 해, 마르틴 하이데거는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의 총장으로 임명된다.

그리고 이 시점이, 그의 철학적 명성보다 더 무거운 그림자를 낳게 되는 전환점이 된다.

 

총장 취임 연설에서 하이데거는 나치즘의 언어를 유사 철학적 수사로 포장하며,

학생들에게 “민족의 운명과 함께하라”고 역설했다. 그는 나치의 이념을 철학적으로 정당화하는 듯한 발언을 꺼리낌 없이 했고, 당에도 자발적으로 가입했다. 당시 수많은 지식인들이 침묵하거나 망명하던 때였다.

 

야스퍼스는 이를 깊은 불안으로 바라봤다.

그는 하이데거에게 편지를 써 “철학자의 언어가 권력의 도구가 되는 순간, 철학은 침묵해야 한다”고 경고했지만,

하이데거는 그 경고에 반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은 철학자로서 “운명의 흐름을 관조하고 있다”고 둘러댔다.

 

문제는 단지 정치적 선택만이 아니었다. 야스퍼스는 유대계 아내 게르트루트를 지키기 위해 교수직을 박탈당하고,

강의도 금지당했다. 나치 치하의 ‘유전적 질병 정책’은 아내마저 강제 입원시키려 했고, 그는 절망 속에서 견딘다.

이 모든 시간 동안, 하이데거는 침묵했다.
야스퍼스는 그렇게 느꼈다.
그리고 그 침묵은, 우정의 끝이었다.

“우정은 인간적 관계를 넘어선다. 그러나 그 인간이 침묵할 때, 더 이상 우리는 함께 사유할 수 없다.”
— 야스퍼스, 전후 회고록에서

 

두 사람의 마지막 편지에는 더 이상 서로를 부르던 애정 어린 호칭도, 사유의 공명도 없다.

대신, 말하지 않는 철학자와,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철학자의 간극만이 남는다.


 

두 스승, 하나의 제자 — 한나 아렌트의 시선

 

한나 아렌트는 하이데거의 제자이자, 짧은 시간이나마 그와 연인 관계였던 인물이다.
그녀는 하이데거에게 철학적 감수성을 배웠고, 동시에 인간적인 실망도 깊이 경험한 사람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녀가 야스퍼스를 진정한 ‘스승’이라 불렀다는 점이다.

하이델베르크에서 만난 야스퍼스는, 철학이란 결국 “세계 속에 함께 존재하는 타인과의 관계를 묻는 일”임을 가르쳤다.

아렌트는 그의 곁에서 단순히 이론을 배우는 것을 넘어서,

사유하는 인간으로서의 책임, 철학자의 윤리에 대해 눈을 뜨게 된다.

“철학이란 존재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 존재가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일임을 잊지 않는 것이다.”
— 야스퍼스, 아렌트에게

 

전쟁이 끝난 뒤, 아렌트는 다시 하이데거에게 편지를 쓴다.
전쟁 전의 관계는 이미 지나간 일이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하이데거의 사유가 지닌 깊이에 감응하고 있었다.
동시에, 그의 정치적 침묵에 대해 실망하고, 책임을 묻는다.

 

그녀는 두 스승 사이에서 끝내 균형을 이루려 애썼다.
하이데거를 지성의 거장으로 인정하면서도,
야스퍼스를 “도덕적으로 가장 존경할 수 있는 철학자”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뒤,
그녀는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 Men in Dark Times》(1968)에서, 두 사람 모두를 다른 방식으로 회고한다.

  • 하이데거는 “존재의 심연을 응시한 철학자지만, 인간의 고통에는 등을 돌렸다.”
  • 야스퍼스는 “철학을 삶의 윤리로 이끈 사람이며, 침묵하지 않았다.”

이 대조는, 결국 한 세기의 철학이 남긴 도덕적 유산이었다.
철학자는 어떻게 시대에 응답해야 하는가?
아렌트는 그 질문을, 말없이 두 스승 사이에 남겨두었다.


 

진리는 우정보다 무거운가

 

두 철학자는 같은 시대를 살았고, 같은 질문을 품었다.
그러나 서로 다른 방식으로 대답했다.
하이데거는 존재의 근원에 침잠했고, 야스퍼스는 타자와 함께 사는 세계를 택했다.
그리고 아렌트는 그 사이에서, 기억하고, 묻고, 기록하는 제자의 길을 걸었다.

 

철학은 언제나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여정이지만,
그 길에서 마주치는 질문들은 결코 추상적이지 않다.

“누구의 손을 잡을 것인가?”
“어떤 침묵은 죄가 되는가?”
“지성은 권력 앞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야스퍼스는 철학자의 침묵이 때로 철학 그 자체의 배반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줬고,
하이데거는 끝내 그 질문 앞에 서지 않았다.

 

우리에게 남은 건,
그 침묵과 고백 사이에서 철학자의 책임을 다시 묻는 일이다.
그리고 그 질문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 참고 자료

  • Hannah Arendt, Men in Dark Times, 1968
  • Karl Jaspers, The Question of German Guilt, 1946
  • Rüdiger Safranski, Martin Heidegger: Between Good and Evil, 1998
  • Richard Wolin, Heidegger’s Children, 2001
  • Victor Farías, Heidegger and Nazism, 1987
  • Hannah Arendt & Karl Jaspers, Correspondence 1926–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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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ritten by To Be or... Whate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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