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조선 후기, 아직 문을 닫고 있던 시대
18세기 후반 조선은 겉으로 보기엔 안정되어 있었지만, 세계 질서는 이미 서서히 요동치고 있었습니다. 유럽은 산업혁명을 지나 아시아로 팽창을 준비 중이었고, 청나라는 활발한 상업과 해외 무역을 통해 변화를 겪고 있었습니다.
조선은 그 변화의 중심에 있지는 않았지만, 일부 학자들은 그 ‘기미’를 청나라를 통해 감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북학파입니다.
2. 북학파란 누구인가?
북학파는 조선 후기 실학자들 가운데 청나라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자 했던 학자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대표적으로는 박제가, 이덕무, 홍대용, 유득공 등이 있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서얼 출신으로, 신분제의 한계 속에서 현실 개혁의 길을 책과 학문에서 찾았던 사람들입니다. 정조의 개혁 정책 아래 규장각 검서관으로 발탁되며 뜻을 펼칠 기회를 얻었습니다.
3. 왜 ‘청’을 바라보았는가?
조선 사회의 많은 유학자들은 여전히 청을 ‘오랑캐’라 불렀지만, 북학파는 그와 달랐습니다. 그들은 청나라의 상공업 발달, 교통 제도, 기술력, 행정 체계 등에서 조선보다 앞선 점들을 확인했고, 이를 배워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박제가는 『북학의』에서 청나라 사람들의 부지런함과 정밀함을 언급하며 조선 사회의 낙후성을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4. 서세동점, 조용히 다가오던 변화
‘서세동점(西勢東漸)’—서양의 세력이 동쪽으로 밀려오던 흐름은 19세기 이후 본격화되지만, 18세기 후반부터 그 전조는 분명히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서세동점(西勢東漸)’: ‘서양의 세력이 동쪽으로 점점 밀려 들어온다’)
- 청나라는 유럽과의 무역이 급증하고 있었고,
- 러시아는 연해주 일대까지 내려와 청과 국경을 맞댔으며,
- 일본은 난학을 통해 서구 지식을 조용히 흡수하고 있었습니다.
조선은 직접적인 충돌을 겪기 전이었지만, 북학파는 그 간접 징후를 청을 통해 읽고 있었던 셈입니다.
5. 배움으로서의 사대(事大)
이전까지의 ‘사대’는 정치적 예속을 뜻했지만, 북학파에게는 의미가 달랐습니다. 이들에게 사대는 현실을 정확히 인식하고 살아남기 위한 지적 개방성이었습니다.
‘배워야 산다’는 인식이 그들의 사상을 이끌었고, 그것이 곧 조선 후기 실학의 방향이기도 했습니다.
6. 마치며
북학파는 개화기의 정치 개혁가처럼 직접 제도를 바꾼 인물들은 아니었지만, 그 이전에 조선의 인식 지형을 넓힌 선각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세계의 변화를 가장 먼저 감지했고, 그 안에서 조선이 살아남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한 지식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사유는 ‘서세동점’이라는 말이 본격화되기도 전에, 이미 시대의 발밑에서 진동을 감지한 조용한 지진계와 같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 참고자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박제가, 이덕무, 북학파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북학의』 원문
- 연합뉴스: “박제가와 이덕무, 책과 우정으로 시대를 꿰뚫다”
- 역사비평 웹문서: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대청 인식 변화
- 국립중앙도서관 디지털 컬렉션: 『북학의』 디지털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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